롱블랙 프렌즈 B
요리가 매우 훌륭해서 그 맛을 보기 위해 특별히 여행을 떠날 가치가 있는 레스토랑. 미쉐린 가이드Michelin Guide가 말하는 3스타의 의미입니다. 전 세계를 통틀어 3스타를 받은 레스토랑은 145곳뿐이에요.
지금 한국에 있는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은 단 한 곳*, ‘모수MOSU’입니다. 올해 1월부터 휴업 중이지만, 내년 초 한남동에 다시 문을 열 예정이죠. 모수 홍콩 지점은 2022년 서구룡 문화지구에 문을 연 후 계속 운영 중이에요.
*2023년 광주요가 운영하던 미쉐린 3스타 ‘가온’은 문을 닫았고, 신라호텔이 운영하는 ‘라연’은 3스타에서 2스타가 되었다.
모수는 넷플릭스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 「흑백요리사」로 주목받은 안성재 셰프의 레스토랑입니다.
안성재 셰프의 인기 비결. 내공이 느껴지는 심사평이었어요. 무엇이 부족했는지, 무엇이 더해져야 하는지를 칼같이 잡아냈죠. 배경도 장르도 다른 요리사들이 그의 심사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한 분야에서 최고라 평가받는 사람은 무엇이 다를까요. 안성재 셰프가 걸어온 길이 궁금해졌습니다. 마침, 차승희 디렉터가 안 셰프와 연이 있다고 했어요. 함께 그를 만나러 갔습니다.
차승희 호스피탈리티씬메이커 디렉터
‘정상에 오른 사람’이 있느냐. 한 사회에서 특정 직업에 대한 동경이 생기는 계기가 됩니다. 김연아 선수나 박태환 선수를 보세요. 이들의 활약으로 이 분야를 꿈꾸는 어린 선수들이 늘었습니다.
안성재 셰프는 그런 의미에서 셰프라는 직업에 대한 인식을 바꿨습니다. 셰프들에게 목표와 희망을 심어줬죠. 미쉐린 3스타뿐만 아닙니다. 올해 ‘아시아 50 베스트 레스토랑Asia's 50 Best Restaurants’*에서 ‘셰프들이 뽑은 최고의 셰프상’을 받기도 했어요.
*세계적인 셰프와 미식 전문가가 모이는 미식 행사. 2013년부터 싱가포르, 방콕, 마카오 등에서 개최되어 왔다.
미쉐린 3스타를 받는 것. 사실은 ‘견뎌내는 일’에 가깝습니다. 최고의 요리와 서비스를 완벽하게 유지해야 하죠.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서 긴장감을 잃지 않으면서요.
그래서 안성재 셰프의 존재감은 더욱 두드러집니다. 그는 어떻게 이 무게를 견디는 걸까요? 종로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4시간, 다시 화상으로 40분 더. 오랜 시간의 대화에서 그 답을 찾아봤습니다.
Chapter 1.
내일보다 오늘이 중요했던 소년
늘 방긋방긋 웃고 말 잘 듣는 막내아들. 안성재 셰프는 어린 시절 자신을 이렇게 회상했어요.
“열 살 땐가, 길에서 오토바이에 치인 적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웃으면서 일어나더래요. 그 정도로 순했죠.”
그의 밝은 웃음과 달리, 집안 사정은 어두워져만 갔습니다. 사기를 당해 할아버지의 회사가 무너졌어요. 아버지가 시작한 토끼 농장마저 중국산 토끼털 수입으로 어려워졌죠.
가족들은 미국으로 떠났어요. 1994년, 캘리포니아 땅을 밟은 안성재의 나이는 13살. 생존을 위한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부모님은 닥치는 대로 일을 하셨습니다. 안성재가 그 옆에서 통역을 도왔죠. 샌디에이고 해변에서 티셔츠를, 주말 플리마켓에서 중고 물품을 팔았어요.
미래나 꿈을 생각할 겨를은 없었어요. 오늘의 삶이 막막했으니까요.
“철이 들어 부모님을 도운 건 아니었어요. 당연히 제가 도와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다른 선택지가 없었죠.”
주방 일을 배운 건 고등학교 시절. 부모님이 미국식 중식당을 열었거든요. 그때 셰프의 꿈이 생긴 건 아니에요. 요리는 생계를 위한 수단이었거든요. 닭고기를 썰고 튀기고, 홀 서빙에 청소까지. 그야말로 모든 일을 다했죠.
공부는 뒷전이었어요. 고등학교도 겨우 졸업했죠. 하지만 세상이 두렵진 않았대요. 10대 내내 세상을 경험했잖아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죠.
전쟁터에서 요리학교로
스무 살에 안성재는 미군에 입대합니다. 생계 전선에서 진짜 전쟁터로 나간 거예요. 4년을 복무했죠. 그는“감옥에 가지 않으려고 군인이 됐다”고 말합니다.
“아시아 이민자들은 대개 거칠게 살았어요. 제 친구들 대부분이 갱gang이었죠. 점점 위험한 일에 빠지는 친구들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군대에 가거나, 감옥에 가거나Go to army or jail’라는 말이 맞구나. 저같이 방황하는 사람에게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란 거죠.”
그는 군대가 체질이었어요. 부모님께 순종적인 성향과, 거리에서 다진 대담한 태도가 있었으니까요. 정비병으로 기술을 쌓고, 제대 후 자동차 정비 학교mechanic school에 등록합니다. ‘포르쉐 정비사’를 꿈꾸면서요.
요리라는 꿈을 발견한 건 2004년. 정비학교 입학을 단 일주일 앞둔 시점이었죠. 우연히 패서디나Pasadena의 르 꼬르동 블루Le Cordon Bleu 앞을 지나가다 궁금해졌대요. ‘요리학교에선 뭘 배우지?’
문을 열고, 입학 상담원을 만났죠. 그리고 그만 홀렸습니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요리하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대요. 취업률 100%라는 말도 마음을 뒤흔들었고요.
“그때껏 짜장면이나 칠리스Chili's*가 최고의 음식인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더라고요. 더 좋은 요리, 멋진 세상이 있단 걸 처음 알게 된 거예요.”
*미국의 패밀리 레스토랑 체인점.
그길로 르 꼬르동 블루에 들어갔어요.
“현실적이지 않은 선택이었죠. 하지만 늘 저에겐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중요했어요.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지금 내가 원하는 것에 충실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부모님도 그를 말리지 않았어요. 입대부터 이라크 파병까지, 마음먹은 건 하고 마는 걸 봤으니까요. 대신 그의 성실함을 믿어주셨죠.
“입학하고 처음 집에 들렀을 때, 엄마가 절 보고 ‘넌 세계 최고의 요리사가 될 거야’라고 하셨어요. 그 후로 절 볼 때마다, 한 번도 그 말을 안 하신 적이 없어요. 그땐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였죠.”
Chapter 2.
설거지도 목표가 될 수 있다
요리에 뛰어든 그의 첫 목표는 최고의 셰프가 아니었습니다. 최고로 설거지를 잘하는 사람이었죠.
입학 첫날, 그는 LA 다운타운의 해산물 레스토랑에 취직했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요리를 배우고 싶었대요. 생활비도 필요했고요. 처음 맡은 일은 설거지. 안 셰프는 ‘누구보다 설거지를 잘하는 사람’이 되는 걸 목표로 삼았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지금 주어진 일을 누구보다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설거지가 내 일이면 설거지를 제일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설거지를 완벽하게 해내자, 굴을 깔 기회가 왔어요. 굴 손질에 익숙해지자, 시그니처 샐러드 만드는 일이 주어졌죠.
“뭐든지 제일 잘하는 사람이 가르쳐준 걸 정확히 따라 하려고 최선을 다했어요. 전 잘 모르니까요. 똑같이 따라 하게 됐을 땐, 이 사람보다 더 잘할 방법을 고민했죠.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뭐든 제가 제일 잘 만들었어요.”
가장 어려운 길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요리를 배우며, 그가 한 다짐이 있습니다. ‘쉬운 길로 가지 않는다. 잘하기 위해선 어떤 어려움도 감수하겠다.’
2007년, 그는 비버리힐즈Beverly Hills의 일식당 ‘우라사와Urasawa’*에 들어갑니다. 미국 서부에서 최고라 알려진 일식당. 하지만 엄격하기로 악명이 높았어요. 셰프가 체벌을 한다는 소문도 있었죠. 두 번의 문전박대 끝에 “무급이라면 일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미국 일식당 최초로 미쉐린 스타를 받았다. 현재는 폐업한 상태다.
아침 6시부터 정오까지는 수업을 듣고, 오후 1시 반부터는 우라사와에서 일했죠. 때로 점심을 굶고 새벽까지 일하기도 했대요. 안성재는 매일 레스토랑 문을 붙잡고 심호흡을 했습니다. ‘오늘도 도망가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요.
2년 반 동안 그만두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어요.
“일을 배우기엔 가장 좋은 곳이었어요. 최고의 일식당이었으니까요.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았어요. 내가 아는 것 중에 최고에 도전한다, 그게 다였죠.”
2009년 프렌치 레스토랑 ‘더 프렌치 런드리The French Laundry’로 이직합니다. 우라사와를 찾은 유명 셰프 코리 리Corey Lee의 눈에 띄었거든요. 600km 넘게 떨어진 나파밸리Napa Valley로 가야 했지만, 개의치 않았어요.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만 집중했죠.
코리 리와 201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베누Benu를 엽니다. 그런데 집세를 감당할 수 없었어요. 공원 잔디밭에서 스프링클러를 피해 노숙을 했대요. 25센트짜리 과자 한 봉지와 싸구려 콜라로 배를 채우기도 했고요. 이렇게 만든 베누는 샌프란시스코 최고의 레스토랑으로 불렸어요. 2012년, 미쉐린 2스타를 받았죠.
모두 어려움을 먼저 생각했다면 내리지 못했을 결정들이었어요. 그 어려운 결정이 모여, 그의 실력이 됐죠.
“돌이켜 보니, 전 항상 제일 어려운 길을 선택했어요. 제일 어려운 길을 선택하면, 그게 제일 좋은 결정이었죠.”
Chapter 3.
배움은 어깨너머로 이루어진다
안성재 셰프는 어떻게 일을 배울까, 궁금했습니다. 기초도 없이, 매번 새로운 레스토랑에서 살아남은 비법이 뭘까요?
“어깨너머로 배우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
그는 우라사와에서의 경험을 들려줬어요. 오너 셰프 히로유키 우라사와는 요리를 직접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배우고 싶으면 옆에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죠. 고등어는 어떻게 씻는지, 칼 손잡이는 어떻게 잡는지, 각도는 어느 정도로 들어가야 하는지. 열심히 지켜본 후에 셰프가 출근하기 전, 미리 고등어를 손질해 놓았어요.
초반엔 잘 안됐어요. 재료를 잘못 손질해 두면 주방에서 바로 쫓겨나 청소를 해야 했죠. 그러면 또 옆에 가서 봤대요. 뭘 틀리게 했는지요. 그렇게 셰프의 손짓 하나까지 눈에 익혔습니다. 2년 만에 셰프는 그에게 모든 재료 준비를 맡겼어요.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데 어떻게 배우냐”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안성재 셰프는 말합니다. “알려주는 것만 배우는 걸로는 부족하다”고요.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의 노하우나 디테일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어깨너머로만 배울 수 있어요. 그리고 그 작은 차이가 완성도를 판가름하죠.
그런데 어깨너머에서 배우려는 친구들이 정말 없어요. 그건 본인이 원해야 하는 거거든요. 대부분은 가르쳐주길 기다리고 있어요. 꼰대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게 배운 사람들이 잘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안성재 셰프가 요리를 처음부터 즐겼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어깨너머로 배운 테크닉을 하나하나 내 것으로 만들 때 성취감을 느꼈죠. 테크닉이 늘어나니 ‘내 요리’를 원하는 맛으로 만들 수 있었어요. 요리가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 되자 재미를 느낄 수밖에요.
Chapter 4.
모수 : 장르는 손님이 정하는 것
안성재 셰프는 201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모수를 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음식을 한식으로도, 일식으로도, 프렌치로도 정의하지 않았습니다. ‘컨템퍼러리 아메리칸 퀴진Contemporary American cuisine’, ‘이노베이티브Innovative’ 같은 수식어는 그가 아닌 미디어가 붙인 거예요.